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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블링의 헌신Roebling's Dedication]]뉴욕 브루클린 브릿지 숨겨진 일화?(ENG Brooklyn Bridge NY)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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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블링의 헌신Roebling's Dedication]]뉴욕 브루클린 브릿지 숨겨진 일화?(ENG Brooklyn Bridge NY)

세이지리더십 2020. 5. 28. 10:08



뉴욕 관광지 중 하나인 브루클린 다리는 가장 길고 오래된 아름다운 다리로 뉴욕의 아이콘입니다. 최초로 철 케이

블을 사용하여 19세기 중요한 기계 공학 업적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브루클린 다리를 바라보며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로블링 가족입니다.


 

존 로블링은 독일 태생으로 미국에 이민 온 토목 건축 기사였어요. 그는 현수교 공사의 선구자로 브루클린 다리의 주요 계획 입안자이자 설계자였죠. 이 당시 넓고 물살이 센 이스트 강을 건너는 방법은 선박밖에 없었는데, 점차 교통량은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어요. 로블링은 이곳에 다리를 놓을 것을 뉴욕 시장에게 주장했죠. 지형적 특성상 강 중간에 교각이 없는 다리를 짓는다는 현수교 설계는 그 당시 너무나도 획기적이고 위험한 방법이라서 전문가들 대부분이 반대했습니다. 존 로블링과 그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이 뉴욕 시장과 금융업자들을 설득하고 공사자금을 모아 다리 건설에 착수하죠.



안타깝게도 존 로블링은 착공 직전인 1869년 측량을 마무리하던 중 보트에 부딪히는 사고로 페리와 선착장 사이에 다리가 끼는 사고를 당합니다. 의사는 그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했지만 3주만에 파상풍 합병증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는 꿈에 그리던 공사를 시작하자 마자 같은 해 사망한 셈이죠. 이스트강을 잇는 현수교를 완성하고 싶은 꿈을 꿈과 동시에 그 꿈이 자신의 사망으로 이어지게 될 줄 아마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존 로블링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은 토목공학 전공으로 아버지와 함께 다리 건설현장일에 종사했죠. 아버지 존의 사망과 동시에 책임 엔지니어로 일하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교각 기초공사단계에서 감압증에 걸려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는 불구가 되어버리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그 상황에서도 워싱턴은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 하나로 브루클린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다리가 설계대로 만들어지는지 망원경으로 공사현장을 지켜보며 감독했습니다. 그는 남은 인생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렸어요.


존 의 며느리이자 워싱턴의 아내인 에밀리 로블링 역시 용감한 여인이었습니다. 시아버지의 사망과 남편의 불의의 사고 속에서 오히려 강한 집념의 여성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남편이 반신불구가 되어 현장에서 지휘감독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자 에밀리는 그의 감독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로 현장을 지휘감독했습니다. 여성의 입장으로 험한 공사판의 현장을 지휘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브루클린 다리는 1869년 착공되어 13년만인 1883년 개통되었죠. 존과 아들 워싱턴 그의 아내 에밀리 로블링으로 이어지는 13년간의 헌신적인 집념의 결과가 오늘날의 브루클린 다리를 탄생시켰습니다. 에밀리는 11년 동안 충실히 워싱턴의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다리 완공을 지켜보게 되죠.


브루클린 다리 공식 개통 전 그 다리를 처음으로 건넌 사람은 바로 에밀리 로블링이었습니다. 첫번째로 다리를 건너는 날, 승리를 상징하는 수탉을 안고 자동차로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죠. 1825m의 거리의 다리 도로를 건너며 만감이 교차했을꺼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국의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행사는 왜 매년 브루클린 다리에서 거행되는 것일까요? 오로지 인간의 손으로 건설된 브루클린 다리는 대를 이은 로블링 가족의 도전과 집념 그리고 600만명의 작업자들과 27명의 사망자의 낸 헌신의 결과였죠. 미국인의 도전과 집념의 아이콘을 이보다 잘 표현한 곳이 또 있을까요?


일생을 브루클린 다리에 묻은 존 로블링

아버지의 계획으로부터 다리를 완성시킨 워싱턴 로블링

신념과 용기로 상념에 빠진 남편을 도운 에밀리 로블링

미국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다짐할 때, 새로운 도전을 준비할 때 브루클린 다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뉴욕 브루클린 다리에 방문하면 로블링 가족의 헌신을 상상해 보세요. 불안과 좌절 속에서도 새로운 도전에 용기를 가지십시요. 인생의 걸작이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집념의 산물이니까요.




The Brooklyn Bridge, one of New York's tourist destinations, is the longest, oldest and most beautiful bridge in New York. There are some people to remember on the Brooklyn Bridge, the first of its kind in the 19th century as an important mechanical engineering achievement using iron cables.  It’s the Roebling family.


John Roebling was a German-born civil engineer who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He was a pioneer of suspension bridge construction, a major planner and architect for the Brooklyn Bridge. At that time, the only way to cross the wide and swelling East River was to use ships. As traffic increases in New York, Roebling insisted the mayor of New York to build a bridge here. Most experts disagreed that the suspension bridge design of building bridges in the middle of the river was so groundbreaking and dangerous at the time. John Roebling and his son, Washington Roebling, persuade the New York mayor and financial lenders to raise funds for construction of the bridge.


Unfortunately, while John Roebling was finishing his measurement in 1869, just before the start of construction, he was hit by a boat and caught his leg between the ferry and the marina. The doctor had an operation to cut his leg, but he died of tetanus complications in three weeks. He died the same year as soon as he started his dream work. He may not have dreamed of a dream that would complete the suspension bridge connecting the East River, and at the same time, it would lead to his death 



John Roebling's son, Washington Roebling, was a civil engineering major who worked with his father on a construction site. Simultaneously with the death of his father, John became a responsible engineer. 

To make matters worse he got the decompression sickness and was not able to move during the foundation work of the pier. Even in that situation, Washington is said to have supervised the construction site with a telescope at his home in Brooklyn to see if a bridge could be built as designed with just his one finger. He suffered aftereffect from the rest of his whole life.


Emily Roebling, the daughter in law of John Roebling and wife of Washington Roebling, was also a brave woman. In the death of her father-in-law and her husband's incident, she is transformed into a woman with a strong commitment. When her husband became handicapped and incapable of directing the scene, Emily directed the scene as a messenger to convey his oversight. It would not be easy for a woman to direct a tough construction site.


The Brooklyn Bridge was begun in 1869 and opened in 1883, just 13 years later. The result of 13 years of devotion of John, Washington, and Emily Roebling gave birth to the Brooklyn Bridge today. Emily will be a messenger for Washington for 11 years and watch the bridge complete.


It was Emily Roebling who first crossed the bridge before the official opening of the Brooklyn Bridge. On the first day of the bridge, she crossed the Brooklyn Bridge by car with a rooster symbolizing victory. I think that she was excited with a variety of emotions on 1825meter length bridge.



Why is America's Independence Day Fireworks held every year on the Brooklyn Bridge? Built solely by human hands, the Brooklyn Bridge is the result of the challenges and devotion of the successive Roebling family and the dedication of 6 million workers and 27 death tolls. Isn’t it the best place symbolizing American spirit of challenge and commitment?


John Roebling who devoted hi life for Brooklyn Bridge.

Washington Roebling who completed the bridge from his father's plan.

Emily Roebling who Helped her husband in despair with courage and faith.

Americans are looking for Brooklyn Bridge as they pledge new hope and prepare for new challenges. Imagine the devotion of the Roebling family when you visit the Brooklyn Bridge in New York. 

Be brave with new challenges Even in fear and frustration. A masterpiece of life is a product of time-consuming commi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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